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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특강② 마태오 복음 5. 인간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주임신부님)

작성자 잠실7동성당사무실
작성일 22-12-10 10:30 | 834 | 0

본문

대림특강② 마태오 복음 5. 인간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주임신부님) 


 

   정화의 길을 계속 가 보자. 우리의 영성이 서서히 정진하면 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깨닫게 되고, 그러면서 자연히 복음이 주는 구원을 더 생생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이 묵상에서는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기보다는 하느님 앞에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게 중요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례 때의 기억을 새롭게 하게 된다.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보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며, 교회 공동체의 한 사람이 된 그 세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 묵상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의그릇된 생각과 잘못이 어떻게 인간 관계를 해치고, 또 공동체를 이루는 데에 장애가 되는지를 살펴 보게 될 것이다.

 

공동체의 발전

 

   일반적으로 공동체를 건설하는 첫 단계에서는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지를 생각하며 꿈에 부푼다. 함께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자 자기의 부족을 깨닫고 서로 의지하고, 의지할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 심리학에서 말하는 공동체의 위기를 체험하게 된다. 함께 산다는 것이 생각같이 아름답고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다른 사람들의 결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소한 일들에도 귀찮아 하고 짜증을 낸다. 신경을 쓰게 하는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저마다 자기를 내세우는 모습에 실망한다. 갈등한다. 공격적이 된다.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매사가 힘겹다. 공동체는 외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이미 활력을 잃었다. 겉으로라도 평온한 체하고 체면을 지키려는 사람들 때문에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공동체의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똑바로 보고 우리 자신 안에서 문제를 찾아야 한다. 해결의 길도 우리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욕심을 접고 공동체의 이익을 찾는 것이다. 우리는 좋은 일을 계획하고도 각자의 생각이 달라 대립을 보인다. 그 대립은 그 좋은 일마저 포기하게 한다. 어떤 이는 속이 끓어 분노하고, 어떤 이는 논쟁에서 이겼다는 이유만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한다는 사실을 잊은 탓이다. 일을 계획하면서 기도하지 않았다. 주님의 마음으로 일을 계획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논의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실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기도하면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주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바꾸는 일부터 먼저 하자.

 

   이제 성경의 세 대목을 묵상하며 우리 문제의 답을 찾아 보자. 우리 안에 무엇이 있어 공동체를 이루는 데에 장애가 되고, 이웃의 긴박한 어려움을 보고도 외면하며, 다른 이들과 진정한 우정을 맺지 못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선 구약의 다윗 안에서 우리 모습을 찾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 마르코 복음서(7,20-23)가 전해 주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 모든 이 안에 깃들어 있는 나쁜 생각들에 집중해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마태오 복음서의 다섯 가지 대조적인 말씀들(5,21-48)을 묵상하면서 주님 안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영의 사람이 되어 돌아 올 것이다. 우리에게 희망적인 것은 우리 안에 하느님을 찾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마음도 있다는 것이다.

 

다윗 인간 실존의 모호성

 

사무엘기 하권 11-12장의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차지한 이야기를 읽어 보자. 여기에서는 이 대목을 다 읽지는 않을 것이다. 기억하는 대로 그 줄거리를 떠올려 보자.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이 이야기의 서술은 문학적으로 구약 성서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이라고 한다. ‘다윗 임금의 실록에 속하는 이 두 장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오래된 사료이며, 문장 면에서도 탁월한 기교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치밀하면서도 심리적으로도 해박함을 보이고 있고, 사건의 극적인 면을 접어두고서도 말 뒤에 숨은 날카로운 유머가 읽는 이를 매혹하고도 남는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히브리 말로 읽을 수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다윗은 장수들과 온 이스라엘을 전장에 내보내 놓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저녁 때에 다윗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왕궁의 옥상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옥상에서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 여인은 매우 아름다웠다.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 보았는데, 어떤 이가 그 여자는 엘리암의 딸 밧세바로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가 아닙니까?” 하였다. 다윗은 사람을 보내서 그 여인을 데려왔다. 여인이 다윗에게 오자 다윗은 그 여인과 함께 잤는데, 여인은 부정한 기간이 끝나 자신을 정화한 다음이었다. 그 뒤 여인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여인이 임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어, ‘제가 임신하였습니다.’ 하고 알렸다”(2사무 11,2-5).


난처해진 다윗 임금은 요압 장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여인의 남편 우리야를 자기에게 보내라고 명령하여 우리야가 다윗에게 왔다. 다윗은 우리야에게 집에 가서 쉬라고 분부하며 선물을 딸려 보냈다. 그러나 우리야는 제 주군의 부하들과 어울려 왕궁 문간에서 자고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다윗은 그를 불러 들여 억지로라도 집으로 보내려고 했지만 우리야는계약 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초막에 머무르고, 제 상관 요압 장군님과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의 신하들이 땅바닥에서 야영하고 있는데, 제가 어찌 제 집에 내려 가 먹고 마시며 제 아내와 함께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살아 계신 임금님을 두고, 임금님의 목숨을 두고 맹세합니다. 저는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11,11) 하고 다윗에게 대답하고는 그날도 집에 가지 않았다. 그 다음 날에도 다윗은 우리야를 불러 먹고 마시고 취하게 만들었지만 제 주군의 부하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고, 자기 집으로는 내려가지 않았다”(11,13). 다음 날 아침, 다윗은 요압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야의 손에 들려 보냈다. 다윗은 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야를 전투가 가장 심한 곳 정면에 배치했다가, 그만 남겨 두고 후퇴하여 그가 칼에 맞아 죽게 하여라”(11,15). 마침내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도 죽었다”(11,17). 요압은 전령을 보내어 우리야의 전사 소식을 곧바로 다윗에게 알렸다. “임금님의 부하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도 죽었습니다”(11,24).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다.


   다윗은 누구인가? 이 사기극을 벌이고 있는 장본인은 누구인가? 그는 뛰어난 전사였으며, 이제는 생애의 최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모든 군인들의 주군인 임금이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하느님을 매우 경외하고, 수많은 시편을 지어 하느님을 찬양한 인물이다.

 

   다윗이 지은 아름다운 시편 하나를 읽어 보자. 그의 인간됨을 엿볼 수 있는 시편이다. 주님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들의 손아귀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 다윗이 지어 주님께 바친 노래이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 저의 하느님,

이 몸 피신하는 저의 바위 저의 방패, 제 구원의 뿔, 저의 성채이십니다.

찬양받으실 주님을 불렀을 때 나는 원수들에게서 구원되었네.

죽음의 오랏줄이 나를 두르고 멸망의 급류가 나를 들이쳤으며

저승의 오랏줄이 나를 휘감고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덮쳤네.

이 곤경 중에 내가 주님을 부르고 내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였더니

당신 궁전에서 내 목소리 들으셨네.

도움 청하는 내 소리 그분 귀에 다다랐네.

……

나의 힘센 원수에게서, 나보다 강한 적들에게서 나를 구하셨네.

환난의 날에 그들이 나를 덮쳤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의지가 되어 주셨네.

넓은 곳으로 이끌어 내시어 나를 구하셨으니 내가 그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네.

주님께서 내 의로움에 따라 나에게 행하시고

내 손의 결백함에 따라 나에게 갚아 주셨으니

내가 주님의 길을 지키고 나의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았으며

그분의 모든 법규를 내 앞에 두고 그분의 규범을 내게서 물리치지 않았기 때문이네”(18,2-23).


그는 참으로 신심 깊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다. 그는구약의 역사에서 가장 경건한 인물로 꼽히는 사람이다. 오늘도 의를 행하며 하느님께 의탁하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바치는 이 아름다운 시편을 지은 사람이다.

 

다윗은 바탕이 선한 사람이다. 자기를 죽이려 한 사울까지도 해치지 않은 사람이다(1사무 24; 26장 참조). 원수의 후손들까지 찾아 내어 호의를 베푼다(2사무 9장 참조).

 

다윗은 근본이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어느 날 다윗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어느 동굴 속에 있었는데, 마침 사울이 그 동굴에 들어 와 뒤를 보았다. 그때 부하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가 너의 원수를 네 손에 넘겨줄 터이니, 네 마음대로 하여라.’ 하신 때가 바로 오늘입니다.’”(1사무 24,5). 다윗은 몰래 사울의 겉옷 자락까지 잘랐지만 그를 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말했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인 나의 주군에게 손을 대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름받은이가 아니시냐”(1사무 24,7).

 

   다윗은 또한 경험이 많고 인생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한계와 인간적 약점도 알고 있었다.

   이러한 그가 죄를 지었다. 밧세바에게서 전갈이 오기까지는 아무에게도 드러나지 않은 채 넘어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밧세바가 사람을 보내어 자기가 임신한 사실을 다윗에게 알렸다. 그는 당황했고 후회했지만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큰 죄를 저지른다.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전장에서 죽게 했다. 임금으로서의 자기 체면 때문에 그 죄를 덮으려고 더 큰 죄를 저질렀다. 쾌락 때문에 시작된 죄가 조직적인 범죄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다윗은 교활한 사람이기도 했다. 꾀를 내어 전장에 있는 우리야를 불러 들였지만 그의 수법은 성공을 하지 못했다. 선하고 충직한 사람이 간교와 악의, 사기와 위선에 가득 찬 사람으로 바뀌었다. 상황에 몰리니 그도 별 수 없었다.

 

다윗의 선한 행적이 모조리 무너져 버린다. 충성스럽고 정직하고 의로운 사나이, 잠자고 있는 사울에게까지 손대기를 꺼리던 인간이 간교하고 불의하고 부정직하고 신의 없는 인간, 자기 부하 장수를 원수로 여겨 적군의 손에 넘기는 자로 변신한다.

 

다윗과 같은 상황에 몰리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다윗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본다. 순식간에 터무니없는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인간이다. 이렇게 인간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우리의 안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모습이 불현듯 나타난다.

 

하느님 앞에 나타나는 자기의 모습

 

주님께서 예언자 나탄을 다윗에게 보내셨다. 나탄은 다윗에게 직접 그의 악행을 지적하지 않고, 스스로 판결을 내리도록 이끈다. 나탄의 비유 이야기를 듣고 다윗이 말한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그런 짓을 한 그자는 죽어 마땅하다”(2사무 12,5). 그러자 나탄이 다윗에게 말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12,7). 이제서야 다윗은 깨달았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12,13). 다윗은 자기의 본 모습을 보았다.

 

   인간은 자기 방어를 위해 형제까지도 서슴지 않고 죽인다. 그러고도 자기 악행을 어떻게든 덮으려고 한다. 자기도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데로 달려간다. 밀려 드는 두려움과 불안에 더 큰 방어 기재로 자기를 감싼다. 사람들과 더 이상 진정한 관계는없다. 그의 모든 것은 거짓이다. 그가 헤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누구의 친구도 될 수 없다. 거짓은 거짓을 키울 뿐이다.

 

   다윗의 경우처럼 사람을 죽이는 극단적인 데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우리의 일상적인 만남들에서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는 경우는 자주 있다. 자기의 약점, 열등감, 죄를 덮으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공연히 트집을 잡고 독설을 퍼붓는다. 이것은인격적 살인일 수 있다.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일까?


사람의 마음에서 악이 나온다

 

   두 번째 묵상 주제도 인간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유다인들의 관습과 관련해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몇 사람과 논쟁을 하시게 되었다. 이 기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7,20-23).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악의 뿌리가 인간의 마음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이 나오고, 그 나쁜 생각들이 행동으로 이어져 악이 모습을 드러낸다. 주위가 평온 무사하면 이 나쁜 생각은 밖으로 나오지 않아 우리는 좋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떤 상황을 만나면 그 나쁜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져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인간의 비참함이 드러난다.


   우리 마음 안에 언제나 자리 잡고 있는 이런 나쁜 생각들이 인간 관계를 망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이 나쁜 생각들을 가지고 있고, 이 나쁜 생각을 실행할 가능성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죄가 나쁘지 사람이 나쁜가? 죄를 미워해야지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되지!” 아니다. 사람이 나쁜 것이다. 죄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그 죄의 주체는 그 사람이다. 죄는 모두 그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야 할 주체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산상 설교의 대조

 

   끝으로 산상 설교의 몇 부분(마태 5,21-48)을 묵상하자. 이 부분은 다섯 단락으로 되어 있다.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길을 배울 수 있는 기회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신다. “너희는 …… 하고 이르신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이 말씀들에 앞서서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의 의미를 먼저 간추려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5,20).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의 의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었다고 알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라도 그들의 의를 뛰어넘지 못하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1-22).

 

   형제에게 성을 내고 형제를 무시하는 태도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나를 높이려는 교만에서만 나오는 것일까?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열등감, 두려움에서 그런 것은 아닐까?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오른손이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5,27-30).


   이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욕정에서 우리 마음을 어떻게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하느님의 도움 없이 나는 구원받을 수 없을 것 같다.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 할 것은 .’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5,33-37).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의 마음이 이중성을 떨쳐 버리지 못할 때에, 자기가 가지고 있지도 않을 것을 가지고 있는 체 할 때, 거짓을 더 가장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하늘을 들먹인다. “내가 하늘을 두고 맹세하건데…” 하는 말들을 우리는 참 많이 들었다. 그런 맹세야 말로 거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서 나의 참 모습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고, 더 인정 받으려고 할 때 더 거짓을 말하게 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데에서 우리는 거짓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자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5,38-42).


도대체가 복수할 생각일랑은 마음속에서 지워 버려야 한다. 방어 자세를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의 복수는 그에게서 또 다른 복수를 불러 일으킬 것이고, 복수의 악순환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과도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서로가 적으로, 원수로 대적하는 세상에서 살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 믿을 놈 하나 없는 세상에 살 것이다. 잔인하고 철저하게 복수할 마음만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는 얼마나 비참할까? 십자가의 어리석음은 어리석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계속하신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43-48).


   우리를 속이고 우리를 등쳐먹으려고 하는 사람, 언제나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과 좋게 지낼 수는 없다. 주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야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다른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고통의 바다, 폭풍의 바다와 같은 이 세상에서 살아 남으려면 우리는 좀 악해져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지 않았던가?

 

   주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려면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보다. 하느님께서도 완전하지 않으시다면 어떻게 이 세상 사람들을 그냥 두고 보실 수 있으실까? 어떻게 악인에게도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어떻게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려 주실 수 있을까? 또 한 번 십자가의 지혜를 청하며 세례 때의 약속을 되새긴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유를 누리고자 죄를 끊어 버립니까?

, 끊어 버립니다.”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악한 생각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우리는 누구의 친구도 될 수 없다. 그러한 우리는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주님께서 우리를 깨끗하고 완전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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