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진 교리 ② 마태오 복음서 입문 2 (주임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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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진 교리 ② 마태오 복음서 입문 2 (주임신부님)
(2) 이렇게 명백히 드러나는 마태오 문체의 특징을 바탕으로, 독자는 나름대로 이 복음서를 더 크게 나누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마태오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독자 스스로 제안해 보는 것일 따름이다. 그렇지만 학자들이 주장하는 세 가지 구조를 살펴보는 것은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
가. 가장 간단한 것은 지리적 이동(le plan géografique)이다. 이것은 일부 학자들이 마르코 복음서에서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예수님의 갈릴래아 전도(4,12-13,58), 갈릴래아 근처의 여러 지방과 이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펼쳐지는 예수님의 활동(14,1-20,34), 끝으로, 예루살렘에서 전개되는 그분의 가르침 그리고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다(21,1-28,20).
나. 다른 학자들은 위에서 언급한 마태오가‘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다.’와 같은 결구로 나누어 놓은 다섯 ‘담화’(설교)(5-7장; 10장; 13장; 18장; 24-25장)에 따라 구조를 확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은 복음서의 자료들이 이야기와 설교로 번갈아 가면서 배치되었다고 하나 꼭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없는 이유는 마태오 복음서가 본보기(예화)가 곁들여진 교리서가 아니라 교의적 의미를 지닌 한 역사적 존재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다. 또 다른 학자들은 미태오가 지리적인 골격(une trame géografique) 위에 예수님 실존의 드라마를 전하려 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마태오 복음서 전체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첫째 부분(3,1-13,58)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어나 유다인들을 그분을 거부하고 믿지 않는다. 말씀에서나 행동에서나 절대적 권능을 지니신 그분께서는(9,35-10,42), 이제 사람들은 그분 쪽에 설지 반대쪽에 설지 선택해야 한다. 곧 청중은 이미 일어나 기적들(11-12장) 또는 비유를 통한 새로운 가르침(13장)을 계기로 자기들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보도록 촉구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신다(13,53-58).
둘째 부분(14-2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당신을 부활의 영광으로 이끄는 길을 걸어 가신다. 두 가지 움직임이 이 이야기에 활기를 불어 넣는다. 한 가지 움직임은 예수님께서 먼저 지리적 바탕 위에서(14,1-16,20), 그 다음에는 교의적 바탕 위에서(16,21-20,34) 당신의 공동체에 특수한 가르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 준다. 두 번째 움직임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곳으로 장엄하게 들어가셔서 성전을 ‘차지하신다’(prend possession du Temple) (21,1-22). 그 뒤에 그분께서는 적대자들과 맞서신다. 곧 세 개의 비유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시고(21,28-22,14), 그들과 벌리신 논쟁을 승리로 끝내시고, 그들의 함정도 훌륭히 벗어나신 다음(22,15-46),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책망하신다(23장). 또 온 세상이 받을 심판을 예고하신다(24-25장). 그러고 나서 사람들이 당신을 재판하고 단죄하도록 내버려 두신다(26-27장).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다시 살리신다(28장).
마태오는 이렇게 드라마와 같은 사건들을 전한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어떠한 유보도 없이 당신을 전적으로 추종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다른 민족들도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선포하신다. 하느님의 백성은 본디 이러한 다른 민족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완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거부함에 따라 그 만남이 분리, 가슴아픈 결별이 되고 만다. 이 때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한 제자들의 공동체가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 반란을 일으킨 소작인들의 손아귀를 벗어난 이 새 백성을 이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21,43).
3. 마태오의 공동체
자료의 선택과 배치를 보면 마태오 복음서가 태어난 공동체의 관심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여기에 그 세 가지 관점을 소개한다.
(1) 마태오는 율법과 구약성서와유다인의 관습을 가장 많이 언급하는 복음서 저자이다. 예컨대 그는 유다교 신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세 분야, 곧 자선과 기도와 금식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또 마르코(7,3-4)와는 달리 유다인의 관습을 따로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이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우선적으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다(10,6; 15,24).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뒤에 수정된다. 곧 율법이 완성되어야 한다는 사실, 구약성서가 예수님 자신을 통하여 성취된다는 점, 끝으로 바리사이들의 전통이 불러 일으킨 오용과 남용을 강조한다. 5장의 산상 설교 가운데에 나오는 반대 명제(“...... 하고 옛 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가 가리키는 것처럼, 모든 것이 철저하게 재해석된다.
마태오는‘기쁜 소식’이 다른 민족들에게 넘어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제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전세계적 차원으로 복음이 울려 퍼지는 일이다. 그리하여 사람의 아들이 집행하시는 재판에 모든 사람이 부름을 받게 된다(25,31-46). 그 전에 모든 민족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라는 초대를 받는다(28,19).
(2)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이 하느님의 계시 과정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들은 예언자이며 현인이고 새로운 율법 학자이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13,52).“그러므로 이제 내가 예언자들과 현인들과 율법 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면 너희는 그들을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또 이 고을 저 고을 쫓아다니며 박해할 것이다”(23,34). 물론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역사적인 실제 모습을 완화시킨 것이다. 제자들을 바라보는 마태오 교회 공동체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마태오는 제자들을 교회 안의 믿는 이들을 위하여 항구적인 가치를 지닌 본보기로 보여 주려고 한다. 예수님 시대에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로 보이기는 하지만(8,26; 14,31; 16,8; 17,20), 이 제자들이야말로 바로 미래의 모든 제자의 행동을 예시하고 있고, 이들의 믿음이 성장한 경험을 통하여 바로 그 미래의 모든 제자에게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3) 끝으로 마태오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 역시 마태오가 속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마태오는 예수님을 ‘스승’ 그 자체로 소개하고(5,2.19; 7,29; 21,23; 22,16과 4,23; 9,35 등) 강조한다.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스승’이라는 용어가 당시 고대 세계의 일반적인 의미로 쓰인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시는 것을 보게 된다(루카 11,1).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보다도 당신께서 어떠한 분이시냐는 문제에 집중된다(요한 8,20.28 등). 그러나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스승님께서 주로 새로운 ‘의로움’, 곧 하느님의 법에 대한 새로운 충실성을 가르치신다(5,19-20; 7,29; 15,9; 28,20).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최종적 ‘권위’를 지니신 ‘종말론적’ 해설가이시다. 그러한 분으로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청중들을 율법학자들이 수호하는(15,9) ‘인간의 전통’에서 해방하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완전성을 가르치신다(5,48; 19,21).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서 첫머리에서부터 그리스도, 다윗의 후손이시며 또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을 생전에 “주님”이라고 부른다는 사실, 그리고 마태오가 진노나 애정 같은 것을 서술하는 마르코 복음서의 표현들을 별로 쓰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마르코 복음서에서보다 훨씬 더 존엄하신 분으로 등장하신다.
4. 독자, 집필 연대, 저자
초대 교부들은 첫째 복음서는 마태오 사도가 “유다교 출신 신도들을 위하여” 저술하였다고 하였다(오리게네스). 그러나 현대 성서학은 이 문제의 복합성에 주의를 기울인다.
우선 여러 가지 정황을 바탕으로 이 첫째 복음서의 탄생지를 규명할 수 있다. 현대의 이 복음서 본문이 아람 말 또는 히브리 말로 된 전통을 반영한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판단한다. 전형적인 팔레스티나 어휘, 마태오가 자기 독자들에게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표현들이나 여러 가지 관습 등이 그러한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히 아람 말 원본을 그리스 말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 말로 편집하였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이 복음서가 유다인들의 전형적인 전통들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팔레스티나 땅에서 유래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통상 시리아 지방, 그 가운데에서도 안티오키아(안티오키아의이냐시오가 2세기 초에 이 복음서를 인용한다.)나 페니키아에서 저술되었으리라고 추정한다. 이 지역에유다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복음서에서는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바리사이들의 전통적인 유다교에 대한 논쟁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유다교의 모습은 기원 후 80년대에 얌니아에 있던 유다교회당의 모임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많은 학자가 이 첫 복음서의 저술 시기를 80-90년대, 어쩌면 그보다 조금 더 이른 시기로 잡는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이 복음서에는 저자에 관한 말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오래 된 전통(2세기 전반부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에 따르면마태오-레위가 그 저자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사도가 현재의 마태오 복음서의 초본을 아람 말이나 히브리 말로 집필하였다고 추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들은 무시할 수는 없지만 확인할 수도 없다.
또한 저자의 이름을 확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서 자체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몇 가지 모습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는 구약성서와유다인들의 전통에 정통한 이로서 자기 민족의 종교 지도자들을 잘 알고 존경하지만 그들을 통박하기도 한다. 또 청중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예수님을 이해시키는 기술에 능통한 이로서 늘 자기 가르침의 실천적 결과를 강조한다. 이러한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 박식한 유다인, 곧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13,52) 같은 이라고 할 수 있다.
5. 첫째 복음서의 실제적 관심
마태오 복음서는 2세기부터 ‘교회의 복음서’로여겨져 왔다. 이 복음서가 ‘교회’에 곤하여 전하는 전통 때문일 것이다(16,18; 18,18). 그보다는 이 복음서에 들어 있는 자료의 내용과 배열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복음서는 오늘날에도 계속 ‘교회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태오는 자기의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복음서를 저술하고 자기의 교회 공동체에 말을 한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 시대의 표현을 말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교회의 목소리와 일체가 되어 오늘은 우리가 듣기 어려운 ‘목격 증언’(témoin oculaire)을 듣게 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지난 시대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그에게 접근하는 대신에 우리는 마태오가 전하는 복음을 마태오 교회 공동체의 복음으로 읽어야 한다. 따라서 이 복음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태오 자신이 그리고 있는 바로 그 신앙인의 자세를 갖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안에는 여기저기에서 구약성서가 자주 인용되는데, 이는 마태오의독자 곧 유다교 출신 신도들에게 꼭 필요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낯설고 번잡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는 이러한 사실들은 염두에 두고 읽으면, 마태오는여전히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강하게 메시지를 전해 준다.
마태오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완성되었음을 전하면서, 그 기원의 전통 안에 있는 교회의 뿌리를 드러내 보여 준다. 교회는 ‘새 이스라엘’(le nouvel Israël)이 아니라 ‘참 이스라엘’(le véritable Israël)이다. 교회는 이스라엘 안에 자기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이스라엘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이 이제라도 자신을 완성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귀의하는 길을 가리켜 준다.
마태오는 교회를 하늘 나라와 동일시하지 않음으로써, 오늘날의 교회에 참된 교회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교회에 의미를 주고,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통치는 인간 역사 안에 작용하면서 교회가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하여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 또는 있어야 하는지 그 길을 가리켜 준다.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 시대의 제자들의 자세를 본받으라고 권고한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들과 함께 자기의 전능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때로는 자기의 약한 믿음을 나무라시는 그분의 소리를 들으며, 또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파하라는 사명을 받는다. 이렇게 하여 믿는 이와 그의 주님이신 예수님 사이의 관계가 활발해진다.
부활하신 분께서는 변천하는 세상 속에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시면서, 믿는 이들이 당신께서 지상 생활을 하실 때에 내리신 가르침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갈 것을 촉구하신다. 부활하신 분,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서가 이야기하고 있는 나자렛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 이것이 마태오가 전하는 증언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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