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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진 교리 ① 복음과 복음서 2 (주임신부님)

작성자 잠실7동성당사무실
작성일 22-09-29 11:07 | 594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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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진 교리  복음과 복음서 2 (주임신부님)


2) 신약성서의 정경

 

사도 전승을 보존하고 있는 책들을 성서로 여기고 전례 집회에서 읽어 왔다. 이 작품들은 ‘사도 교부’들의 작품에 인용되고 있다. 신약성서의 정경도 점차적으로 이루어진다. 신약성서의 정경이 오늘처럼 확정된 것은 트리엔트 공의회(154648)에서였다.

성서는 그리스도에서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 되는 책이다. 그래서 4세기 중반부터 성서를 본격적으로 카논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서 율법과 예언서(“=구약성서)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에 덧붙여 거룩한 책들의 새로운 수집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또 제작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간추릴 수 있다.

첫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 문제와 관련하여 최고의 권위를 행사하는 주체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초기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이 하느님의 계시라는 인식 아래 거의 모든 부분을 인용하는 구약성서이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매우 빠르게 퍼져나간 권위의 둘째 주체는 일반적으로 주님이라고 불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표현은 이전에 예수님께서 내리신 가르침(1코린 9,14),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부활하신 분의 권위를 가리키다(2코린 10,8.18). 기준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이 주체 가운데에서 구약성서만 문서로 되어 있었다. 반면에 주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설교는 오랫동안 구두로만 보존된다. 그러다가 마지막 사도들이 세상을 떠날 때에야 비로서 그들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글로 적어 놓거나 그들이 편집한 것들을 안전하게 보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초창기에는 구두 전통의 권위가 문서에 비해 크게 우세한 가운데에서도,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새 작품들에 부여된 권위가 문제로 떠오른다.

150년 경까지는 그리스도인들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거룩한 책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선집(recueil)의 기본 골격을 향해 나아간 것 같다. 처음에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집회를 열고 바오로 사도의 서간 선집을 봉독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기존 (구약)성서의 보충판을 만들려는 의도는 없었다. 사실, 바오로의 문헌들은 전반적으로 복음서 전통이 구두로만 보존되어 내려오던 시기에 이미 저술되어 있었다. 바오로 자신이 자기의 서간들을 신도들이 모여서 읽을 뿐만 아니라 부근의 다른 공동체들도 돌려 가며 보도록 권장한다(1테살 5,27; 콜로 4,16).

   아무튼 2세기 초부터, 여러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이 바오로의 많은 서간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서간들이 매우 일찍 선집으로 만들어져, 빨리 그리고 널리 퍼져 나아갔다고 결론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바오로의 이 문헌이 권위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는 하였지만, 2세기 초 이전까지는(2베드 3,16 참조) 그것이 거룩한 문서로, 곧 성서에 비길 수 있는 권위를 지닌 문헌으로 여겨졌다는 말은 없다.

   이 기간 동안에 복음서들의 위치는 바오로의 서간들처럼 명백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초대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이 그들의 작품에서 복음서들을 인용하거나 시사하는 글귀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 저자들이 실제로 문서들을 눈앞에 펼쳐 놓고 인용하였는지, 말로만 전해지는 전통의 단편들을 머릿속으로 기억하면서 썼는지 추정하기 어렵다. 아무튼 140년까지는 복음을 수록한 문헌들을 모아 놓은 것이 있다고 언급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다가 2세기 후반에 와서야 복음서들의 총서(une collection d’évangiles)가 존재하고 그 권위가 점진적으로 인정되었다는 증언들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대략 150년부터 신약성서의 경전 형성에 결정적인 시대가 시작된다. 유스티노 순교자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주일 집회 때 네 복음서를 봉독하고 이 복음서들을 사도들(또는 사도들과 최소한 직접 관련되는 사람들)의 작품으로 여기며 이 복음서들에 성서와 비슷한 권위를 부여하면서 인용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이 문헌들이 그러한 큰 권위를 지니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사도들에게서 유래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 때까지 내려온 전통과 일치하는 주님의 역사를 이야기한다는 점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곧 이어서 이 작품들이 사도들과 직접 관련된다는 사실이 강조되기에 이른다. 특히 같은 유형의 문헌들이 많아질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대부분 조잡한 모방이나 순전히 상상에서 나온 것들이어서 복음서들을 보호해야 할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자 네 복음서가 지닌 우월성이 명백하게 드러났고, 이로써 네 복음서가 경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은 개별적으로 경전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신약성서 경전이 있다는 생각이 교회 안에 확고히 자리잡았을 때, 서간의 선집 전체가 경전 안으로 받아들여졌음이 거의 확실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약성서의 경전에 관한 원칙이 생겨났지만, 그 원칙이 실제로 논의된 적은 한 번도 없음을 엿볼 수 있다.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문헌들이 경전에 포함되는지 상세히 밝혀야 할 때에 가서야 비로소 경전에 관한 신학적 숙고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움직임은 (160년에 사망한) 이단자 마르키온의 등장으로 촉진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마르키오은 구약성서의 권위를 완전히 부정한다. 이로써 그는 새로운 경전을 마련해야 하는 절박한 필요성을 느끼면서 새로운 경전의 원칙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경전에 속하는 작품들의 최종 목록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다양한 그리스도 공동체들 사이에 교회는 하나라는 의식이 커지면서 경전에 관한 의견의 일치도 신중하게 서서히 이루어진다. 모든 지역 교회가 동일한 경전을 갖고자 한 것이다.

 

   3세기 초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발전의 결과를 총괄적으로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어디에서든지 네 복음서는 더 이상 논박되지 않고 부동의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경전의 둘째 부분, 사도 문헌과 관련해서는 성서로 인용되는 바오로의 열 세 서간과 사도행전과 베드로의 첫째 편지를 거의 대부분의 공동체에서 보게 된다. 요한의 첫째 편지와 관련해서도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최종적 경전이 이제 기본 형태 이상으로 꼴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온 교회에서 인정받는 작품들과 달리 일부 교부들은 경전으로 인정하지만 다른 교부들은 유익한 문헌으로만 여기는 작품들도 있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베드로의 둘째 편지, 야고보와유다의 편지가 이 경우에 속한다. 어떤 작품들은 경전으로 여겨 인용되던 작품들이 뒤에 경전에서 제외된 경우도 있다. 헤르마스의 목자, 디다케, 클레멘스의 첫째 편지, 바르나바스의 편지, 베드로의 묵시록 등이 그러하다.

 

   경전이 형성되어 가는 이 단계에서는 사도성의 기준이 보편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도와 연관되지 못한 작품들은 마침내는 배제된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묵시록은 가장 논란이 되었던 작품들이다.

 

   이러한 경전의 형성은 4세기에 끝난다. 이렇게 종결된 경전은 대체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목록과 동일하다. 로마 교회의 우위성이 점점 뚜렷해지는 교회의 일치를 위한 배려가 경전 형성의 여러 단계에서 드러나는 대립을 완화시키는 데에 적지 않는 공헌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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