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특강③ 마태오 복음서_기도의 은혜 (주임신부님)
- 마태오 복음 6. 기도의 은혜.docx(24.3K)[14]2022-12-17 10:08:44
본문
대림특강③ 마태오 복음서_기도의 은혜 (주임신부님)
6. 기도의 은혜
마태오 복음서의 몇 대목을 먼저 읽고 시작하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5-8).
(빵의 기적을 행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마태 14,22-23).
“그때에 그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앞으로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로 가서 기도하셨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와 보시니 그들은 여전히 눈이 무겁게 감겨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그대로 두시고 다시 가시어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마태 26,38-44).
우리도 주님의 기도에 마음을 맞추어 기도하자.
주 예수님, 저희 기도가 얼마나 자주 변덕을 부리고 저희 마음이 얼마나 심하게 흔들리는지 주님께서는 아시나이다. 주님, 저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저희 자신을 속속들이 보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가? 기도가 우리의 생활을 얼마나 변화시켜 주는가?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무엇인가? 기도는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한다. 기도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의 신비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11,1) 하고 청하기는 하지만, 기도는 하면서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지 누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도의 길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도 이론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기도를 가르쳐 줄 수는 없다. 기도하는 사람은 성령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 놓고 무상(無想)의 상태에서 하느님을 만난다. 이를 일컬어 ‘기도의 신비’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6,6) 하고 말씀하신 것은 이 신비를 가리키신 것이다. “골방”(ταμειον)으로 번역된 이 낱말은 팔레스티나 주택에서는 광을 가리키는 것으로, 집 안에서도 완전히 격리되고 차단되는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인간은 자신과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다. 자기 자신의 사회적 체면을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제까지 우비를 쓰고 샤워를 했다면 이제는 발가벗고 샤워하듯 기도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남들 앞에서 하는 기도, 여러 사람이 함께 바치는 기도를 나무라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는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말씀하셨고, 최후 만찬 때에는 그들과 더불어 기도하셨다. 따라서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말씀은 어떤 계명이라기보다는 기도의 의미를 깨우쳐 주시려고 하신 말씀이다. 기도는 각자 하느님과 공유하는 비밀이며 아무도 그 비밀을 엿볼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기도는 하느님 앞에 드러난 나의 진실 그 자체이며, 하느님만이 그 바닥을 아신다.
왜 기도하는가?
기도는 왜 필요한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미 다 알고 계신다면(마태6,8 참조) 구태여 하느님께 우리의 사정을 말씀드릴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찬미의 기도만 바치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자신이 가난하고 불쌍한 존재임을 드러내어 말씀 드리기 마련이며, 찬미가 훌륭한 기도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말씀을 찬미에 국한시킬 수만은 없다.
우리의 주님,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는 분이셨다. 그분이야말로 기도가 필요 없는 분이셨지만, 그분께서는 늘 기도하셨고, 그것도 오랫동안 기도하셨다. 예수님께 기도는 일상의 생활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지 말하고 하시고는(마태 6,7 참조), 당신께서는 “같은 말씀”(26,44)을 되풀이하시면서 오랫동안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앞에서 당신 자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기도는 이렇게 하느님 뜻에 충실하고자 하는 인간의 다짐이다.
기도는 겉으로 표현되는 믿음이다. 기도는 믿음의 호흡이다. 사람은 믿음이 있어서 기도한다. 사람은 기도로써 자기의 믿음을 표현한다. 사람은 기도하면서 사람이 되어 간다. 기도하면서 사람은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안다. 기도는 사람의 존재 양식이다.
기도의 내용과 형태
기도의 내용과 형태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기도는 그 내용에 따라 찬미와 흠숭, 청원 기도와 전구, 감사 기도와 찬양 기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기도들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내려 주셨기에, 인간은 그 보답으로 모든 복의 원천이신 분께 찬미를 드릴 수 있다. 청원 기도의 목표는 용서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추구, 그리고 필요한 모든 것을 청하는 것이다. 전구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청원하는 것이다. 전구에는 한계가 없으며, 원수들을 위해서도 전구한다. 모든 기쁨과 모든 슬픔, 모든 사건과 모든 필요가 다 가사를 드리게 하는 동기가 될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감사 기도에 참여하게 해 주는 이 감사 행위는 전 생애에 걸쳐 해야 할 것이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8). 이해 관계를 완전히 초월한 찬양 기도는 하느님께 향한다. 찬양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시기에 그분을 기리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에’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645-2649).
기도의 형태에 따라 소리 기도, 묵상, 관상 기도로 분류할 수도 있다. “몸과 정신이 결합된 인간 본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소리 기도는, 당신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시고 또한 제자들에게도 ‘주님의 기도’을 가르쳐 주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몸을 마음의 내적인 기도에 일치하게 한다. 묵상 기도는 사고력, 상상력, 감정, 의욕을 동원하는 탐색적인 기도이다. 묵상의 목적은 우리네 삶의 현실에 비추어 고찰한 주제를 신앙을 통해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관상 기도는 기도의 신비를 단순하게 나타내는 기도이다. 관상 기도는 예수님께 신앙의 눈길을 고정시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말없이 우리 사랑을 나타내는 기도이다. 관상 기도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만큼, 그리스도의 기도에 합쳐지게 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722-2724).
이런 전형적인 구분보다 매우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하는 기도도 있다. 소란스럽기까지 하다.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심령 기도’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언어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 기도를 바치는 사람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몸과 감정을 일치시켜 이 기도를 바친다. 그러나 이 기도가 얼마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삶의 변화를 가져 오는지는 모른다. 요즘 우리 나라에서는 심령 기도를 기본으로 했던 ‘성령 운동’의 기운을 거의 느낄 수 없다.
성서 봉독(Lectiodivina)을 바탕으로 하는 묵상 기도가 요즘 다시 많은 수도자들과 신자들에게서 커다란 호응을 받고 있다. 이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을 전통으로의 회귀로 단순하게 해석할 수만은 없다. 말씀으로 기도하며 그리스도를 만나고, 말씀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는 노력들이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면 좋겠다.
아토스 수도원의 ‘예수의 기도’
수사들은 밤 1시부터 2시까지 자기 방에서 ‘예수의 기도’라는 것을 염송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를 수천 번 되풀이한다. 그러고 나서 2시에 종이 울리면 수사들은 성당으로 가서 시편 기도를 바친다. 계속하여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예수의 기도’가 어떻게 인간을 성화하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수사들은 호흡에 맞추어 이렇게 기도하며‘기도의 상태’로 들어간다. 언제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기도의 상태라는 것은 외적인 도움이나 자극이 거의 중단된, 있는 그대로의 자기, 비록 가난하고 불쌍한 모습이라도 참다운 자기가 되는 경지를 말한다. 우리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성숙되어 나타나는 경지다. 우리도 혼자 있을 때에 아니면 걸으면서 늘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기도함으로써 언제나 기도할 수 있는 ‘기도의 상태’로 우리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늘 바치는 묵주 기도도 이 기도의 상태로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다.
영(靈)으로 바치는 기도
그리스도교적 기도의 전형은 영으로 바치는 기도이다. 여러 가지 기도로써 우리는 고무될 수 있지만 그런 기도들은 모두 이 영으로 바치는 기도에 이르는 준비 기도가 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 4,24). 이 기도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바치는 기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에 이끌려 바치는 기도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성령으로 바치는 기도이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어떻게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에게 성령께서 기도하게 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처지를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 성령께서 우리의 처지를 보게 하시어 기도하게 하신다. 자기 처지를 올바로 보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성령에 이끌려 기도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신비체 전체를 보게 한다. 그의 기도는 이제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공동의 기도, 교회의 기도에 합치한다. 그 개인의 기도는 교회의 기도 속에 소멸되어 공동의 기도가 된다. 우리에게 개인의 기도를 멈추고 공동체의 기도, 교회의 기도로 몰입하게 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기도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며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께 나아간다. 이렇게 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겐그리스도인으로 머물게 하는 길이며, 그 길을 통하여 구원에 이른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